로그인

회원 로그인

주요서비스 배너

  • 대출조회
  • 대출예약
  • 희망자료신청
Total : 17개 (page : 1/9)
부인사지

부인사지

  • 구분 기념물
♠지정종별 : 대구광역시 기념물 제3호 (1988. 5. 30 지정)
♠보관장소 : 동구 신무동 356

팔공산 순환도로를 통해 동화사에서 파계사 가는 길목의 거의 중간 지점에 위치하는 부인사는 7세기경 창건되었다 한다. 경내에 신라 선덕여왕의 영정을 모시고 해마다 사찰에서 선덕여왕 숭모제를 지내고 있으며, 부인이란 선덕여왕을 칭하여 불렀던 호칭이라는 연구 결과 등으로 미루어 이 절이 선덕여왕의 원당으로 전래되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문헌자료에 따르면 부인사는 1232년(고려 고종 19) 몽고침입 때 소실된 바 있는 고려의 호국정신과 민족문화의 상징인 초조대장경판을 보관했던 사찰이며, 또 고려 무신정권에 항거해서 봉기한 승려의 본거지였다. 지금 경작지로 변해버린 옛 부인사의 사역에는 축대, 초석, 당간지주 등의 많은 석조물이 있고 또 경내에는 석탑, 석등, 배례석 등이 남아 있어 옛날의 규모를 파악할 수 있게 한다.
또 부인사에서 남서쪽 약 300m 떨어진 나직한 구릉지대에 또하나의 사지가 있다. 여기에는 나말여초의 주초석 석탑 등의 많은 석재가 있고 축대석도 곳곳에 남아 있다. 부인사 경내의 석조물과 비슷한 시기의 것으로 부인사에 속했던 암자로 추정되며 부인사의 당시 모습을 잘 보여 준다 할 수 있다.
신숭겸장군 유적

신숭겸장군 유적

  • 구분 기념물
♠지정종별 : 대구광역시 기념물 제1호 (1982. 3. 4 지정)
♠보관장소 : 동구 지묘동 526일대

이 곳은 고려 태조때 개국공신 장절공 신숭겸 장군이 순절한 곳이다. 신숭겸 장군은 태봉의 기장으로 있으면서 배현경 등과 궁예를 내몰고 왕건을 받들어 고려를 개국하였다. 장군은 그 뒤에 대장군이 되어 927년(태조 10년)에 신라를 위기에서 구하려고 태조 왕건과 함께 후백제군을 상대로 대구 공산(公山)에서 싸웠으나 후백제군에게 대패하였다. 이 싸움에서 장군은 왕건의 목숨이 경각에 달하자 왕으로 변장하여 김락(金樂) 장군과 같이 싸우다 왕건을 대신해서 전사하였으며, 이틈을 탄 왕건은 장졸로 변장하여 적의 포위망을 뚫고 단신 탈출한다.
태조 왕건은 장군의 죽음을 애통하게 여겨 그의 시신을 거두어 광해주(지금의 춘천)에 예장하고, 전사한 자리인 이곳에는 지묘사를 세워 명복을 빌게 하는 한편 일품전지 삼백묘를 하사하여 이를 수호하게 하였다. 그후 지묘사는 고려 멸망과 더불어 폐사되었으나 1607년(조선 선조 40)에 경상도 관찰사 류영순이 폐사된 지묘사 자리에 표충사(表忠祠), 표충단, 충열비를 건립하여 공의 혼을 위로하고 충절을 추모하였다.
지금도 표충사 앞쪽 동화사와 파계사로 갈라지는 고개를 왕건의 정예군이 크게 패하였던 고개라 하여 파군(破軍)재라 부르고, 파군재 남쪽 산기슭의 봉무정 앞에 있는 큼직한 바위는 왕건이 탈출하여 잠시 앉아 쉬었다고 해서 독좌(獨坐)암이라 부르며 표충사의 뒷 산은 왕산(王山)이라 부르고 있다. 이러한 지명이외에도 대구에는 이 싸움에서 유래된 안심, 해안, 반야월 등의 많은 지명이 남아 있어 당시 격전지의 자취를 잘 보여주고 있다
처음 페이지 이전 페이지 1 2 3 4 5 6 7 8 9 다음 페이지 마지막 페이지

퀵메뉴